故 기형도 시인
경기도 안성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고 기형도 시인의 묘소
앞서 예고하고 또 약속한대로 오늘 기형도 시인을 만나고 왔습니다.
경기도 안성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그의 20주기 추모식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족, 지인, 문단의 선후배 등 4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신문사 입사동기생이지만 장례식 때는 사정상 장지까진 따라가지 못해서
기형도 시인의 묘소를 찾은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아침 10시 조금 넘어 서교동 홍대 인근 문학과지성사 앞에서 버스로 출발했습니다.
이곳에서 오랫만에 중앙일보 선후배들을 만났습니다.
먼저 기형도가 중앙일보 문화부 시절 문화부장이셨던 정규웅 전 국장을 비롯해
기형도 직계 후배인 박해현 기자, 그리고 역시 문화부 출신 이경철 선배 등.
이들 세 분들은 모두 문학담당 기자 출신들로, 문단 식구도 있습니다.
정 국장은 문학평론가이며, 박해현 차장은 현재 조선일보 문학담당 기자이며,
이경철 선배는 중앙일보에서 문학담당 기자를 하다가 지금은 대학에서 강의중입니다.
기형도가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대절버스는 아직 봄이기에는 이른 들판과 시골길을 두 시간 가량 내달린 후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공원묘지 산중턱에 우리 일행을 내려놓았습니다.
나와 몇몇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기형도 묘소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족들이 묘소 참배를 마쳤더군요.
나는 이리저리 산세를 둘러보고 추모식에 동참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이 언덕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안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소설가 성석제씨가 기형도 시인의 연보를 소개하고 있다. 그 옆으로 사회를 맡은 이문재 시인이 서 있다
추도식에는 연세문학회 후배들도 여럿 참석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우상호 전 의원으로 그는 기형도 3년 후배다.
20주기 추도식은 생전에 기형도와 친교했던 이문재 시인의 사회로 시작됐는데,
첫 번째로 역시 기형도의 친구였던 소설가 성석제씨가 그의 연보를 소개했습니다.
1960년 3월 13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1989년 3월 7일 생을 마쳤습니다.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기형도는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이어 그의 작품 낭송이 이어졌는데, 후배시인 조동범씨가 ‘진눈깨비’를,
뒤이어 연세문학회 후배 황경선씨가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마지막으로, 현 연세문학회장인 대학생이 ‘대학시절’을 차례로 낭송했습니다.
이어 오늘 추도식을 주관한 문학과지성사 김수영 대표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끝으로 생전에 기형도도 불렀을 ‘연세문학회가(歌)’를 후배들이 불렀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연세문학회 출신 졸업생들도 더러 참석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연대 국문과 81학번인 우상호 전 의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행사를 마치면서 사회를 맡았던 이문재 시인이 한 마디 하더군요.
“여기 올 때마다 매번 추웠는데, 그래도 오늘은 좀 덜 춥습니다.
그리고 매번 마음이 무거웠는데, 올해부터는 좀 가벼워지기로 했습니다”라고.
기형도의 가족들. 오른쪽부터 막내외삼촌, 모친, 큰누이
낯선 분들이 몇 분 계시길래 그의 가족 같아서 말을 붙여보았더니 역시 그랬습니다.
기형도의 모친을 비롯해 큰누이, 막내외삼촌 내외 등 대여섯 분이 오셨더군요.
20년 전 그의 빈소에서 보았겠지만 모두 처음 보는 얼굴 같았습니다.
모친은 경기도 시흥에 혼자 사시는데 올해 76세로, 3년 전에 심장수술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현재 특별히 건강이 나쁜 곳은 없고, 성당일로 바삐 사신다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큰누이 향도씨(53세)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데 이번에 겸사로 귀국했다고 하더군요.
저와 이러저런 얘기 끝에 큰누이는 동생(형도)에 대한 추억 하나를 들려줬습니다.
“동생들 중에서도 형도는 사람 같구나,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학평론가)선생님들이 그 백그라운드의 70~80%를 맞춰내시더라구요.
어릴 때 내가 업어서 키웠는데, 세 살 무렵 내 등 뒤로 문자를 깨우치더군요.
형도는 한 마디로 말해 '애어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도식이 끝 난 후 묘소 주변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날씨조차 차왔지만 시장기에 나는 도시락 하나를 다 비웠습니다.
20년 째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을 형도는 그 순간 생각나지도 않았습니다.
언젠가 지인 장례식 때 벽제화장장에 따라갔을 때 목격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고인의 관을 막 화구(火口)에 넣고 나와 일행들이 지하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서럽게 울면서도 연신 밥숟갈로 밥을 퍼먹었습니다.
이를 본 한 사람이 ‘눈물은 하행선, 밥숟갈은 상행선’이라고 조크를 하더군요.
기형도 시인의 20주기를 맞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기념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
형도는 갔습니다.
그는 이미 20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의 육신은 이미 백골이 진토돼 흙으로 돌아갔겠죠.
그러나 그의 시혼(詩魂)은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어떤 이가 돌아오는 차속에서 기형도의 대선배인 정규웅 전 국장에게
오늘 추도식의 한 마디 소감을 묻자, 정 전 국장이 이렇게 답하시더군요.
“죽어도 영원히 사는 법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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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돌아오는 차 속에서 중앙일보 선후배들과 젯상에 올렸던 대구포를 안주삼아
소줏잔을 기울였습니다. 취기가 돌아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신촌 근처였습니다.
그의 문우들과 문학회 후배들은 한 잔 더 하겠다며 군중속으로 총총 사라져갔습니다.
형도를 보낸 지 비록 20년만에 찾아갔지만 만나고 오니 이렇게 마음이 편안합니다.
안성 천주교 공원묘지 입구
공원묘지 내의 무덤들
기형도의 묘비(묘지번호 10-다-12)
위에서 바라 본 기형도 묘소. 주최측에서 젯상을 차리고 있다.
연세문학회 후배들부터 참배가 시작됐다.
문학과지성사 직원들이 참배하고 있다
묘소를 에워싼 기형도의 후배와 지인들 기형도의 묘소앞에서 기념촬영한 필자. 등 뒤로 보이는 꽃바구니가 중앙일보 21기 동기생 명의로 보낸 화환이다. 참배객들이 제사를 지낸 후 삼삼오오로 모여 점심을 먹고 있다 모친과 큰누이 향도씨. 큰 누이는 기형도가 어릴 때 업어서 키웠노라고 했다. 그 시절엔 몇 살 위 누이들이 어린동생을 업어서 키우곤 했다. 헤어지기 전에 버스 옆에서 기형도의 가족들과 선후배들이 한 자리에 섰다. 기형도가 중앙일보 문화부 신출내기 기자시절 문화부장이었던 문학평론가 정규웅(오른쪽) 전 국장. 왼쪽은 기형도의 직계 후배로 기형도와 친하게 지냈던 박해현 기자. 박 기자는 현재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문학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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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기형도 시인은 죽어 말이 없지만, 정규웅 님의 얘기처럼 살아있는 자에게 '죽어도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는군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영혼 같은 '활자'들도 집집마다 서가 한켠을 지키고 있구요...정 선생님! 포스팅 잘 봤습니다. 뾰로롱~~~!
님도 형도의 팬이시군요.
님처럼 기억하는 이가 있는 한
그의 시혼은 오래오래 기억되겠죠.
고맙습니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잠들고 계신 곳에 기형도시인님도 계셨네요.
제 대학시절,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했던 제가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시낭독을 듣고 심장이 떨려올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준 시인이셨습니다. 잎속의 검은 잎...의 마지막 귀절...
당시의 남자친구였던 재민이란 아이와 기형도시인의 이야기와 시들에 대해 밤새 이야기하고 낭독했던 오래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제가 94학번이니 참 오래전 일이네요.
전 아직 독신이고 그 남자친구도 독신이라 전해들었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MBA과정을 밟고 있다고 얼마전 친구통해 건너 들었는데 잘 사나 모르겠어요.^^;;
기형도님의 20주기를 맞이해서 가슴떨리게 벅찼고 가슴시리게 아팠던 제 옛사랑이 추억이 떠오르는 밤이기도합니다.
기형도 시인님의 시들은 아직도 제 블로그나 홈피에 일기처럼 올리기도하고 순간순간 그분의 시귀절을 읊조리기도 합니다.
저희 외할머니와 같은곳에 계시다니 언제 외할머니뵐겸 찾아가봐야겠습니다.
소중한 포스팅 감사드립니다.
혜나님에게는 또 그런 추억이 있으시군요.
혜나님 또래 중에서 형도를 기억하는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언제 외할머님 뵈러 가시는 길에 형도도 한번 만나고 오셔도 좋을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입속의 검은 잎..인데 오타냈네요.
비밀번호를 잘못입력했는지 수정을 못하겠어서 ^^;;
괜찮습니다^^^
그가 살아서 40살 50살이 되었다면 어떻게 인생을 바라보고,
어떤 글을 썼을지.
가끔 그게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궁금하답니다.
이런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계속 중앙일보에 다닌다면,
지금 직위는 부국장, 혹은 국장급 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의 '조중동'이라 불리는 중앙일보에 과연 다니고 있을지,
아니면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 지 궁금하답니다...
'빈집'이란 시를 읽고 섬뜻했던 기억이 있네요...
저도 그런 독자를 본 적이 잇는데요,
여기 그 전문을 옮겨봅니다.
[빈집]
- 기형도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니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비밀댓글 입니다
그날 오셨으면 좋았을텐데요, 그쵸?
제 글 퍼가셔도 무방합니다...
대학 1년때 3편을 엮은 옴니버스 연극을 한적이 있는데
이 시집하고 기형도씨 생을 극으로 각색하고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 란 소설을 극으로 만들고
자체 창작극 하나랑 해서 총 세편 연작이였죠.
신입생 막 입학하고서 배우로 뛰었던 첫 연극이었는데
극 이해를 위해 따로 스터디까지 짜서 공부했건만
1학년 1학기 신입생에겐 시집도 너무 어려웠고
극 자체도 상당히 어려웠었죠 -_-;
마냥 즐거웠던 95학번 신입생에겐 너무 어둡고 피상적이었어요.
대학연극 치곤 드물게 연일 만원이었지만 보는 사람 상당수는 졸았다더군요.ㅎㅎㅎ
연극 올리고 얼마 있다가 꽃잎이 영화로 나와서 살짝 놀랬던 기억도 나네요.
저에겐 아니었지만 시집이나 저분 삶이
저의 많은 고학번 선배들이나 극소수의 동기들에겐 하나의 문화로 존재했던것 같아요.. 직접 극까지 짜서 올릴 생각을 했던걸 보면.
님의 선배세대 가운덴 기형도를 '문화' 내지는 전설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아래는 제가 직전에 썼던 기형도 20주기를 맞으며 라는 글에 어떤 분이 트랙백으로 건 내용인데 함 보실래요?
[기형도를 추억하다]
기형도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물리 교생으로 온 선배의 권유 때문이었다.
선배는 두 권의 시집을 선물했는데
하나는 류시화의 '나는 내가 옆에 있어도 그립다'였고
하나는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이었다.
선배는 주의를 당부했다.
기형도의 시는 조심해야 한다고...
금기만큼 치명적인 유혹이 또 있을까?
나는 그가 경고하며 권했던 선악과를 먼저 깨물었다.
그리고 지독히 어두웠던
나의 중세(中世)가 활짝 열렸다.
아! 기형도.
파괴적인 것만큼 건설적인 것이 있을까?
나의 정신에서 8할은 기형도에서 촉발된 고통에 신세 지고 있다.
아이는 심하게 아픈 후에 성숙한다고 했던가?
고통은 가혹하게도 여기가 더는 편안한 자궁 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유대인, 성적소수자, 수많은 콤플렉스가 이룬 거대한 성취는
고통이 창조적 파괴의 숨은 공로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증언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비극적이고 염세적인 언어들은
나의 정신을 이루는 뼈의 마디 마디를
재구성하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동시에 나의 희망은 절망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기형도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었느냐고?
그것은 치명적인 죽음의 유혹이었다.
어떤 이는 병아리를 통해 죽음을 경험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이것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나는 기형도를 통해 죽음을 경험했다.
그의 언어는 나침반 속에서 시종일관 죽음이라는 자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것을 선선히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요절함으로써 이것을 증명했다.
그 죽음의 암시가 너무나 강렬해서
나는 몸이 아플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래서 나는 더는 기형도의 시를 열지 않는다.
너무나 아팠고,
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추억할 뿐.
그러나 그는 나의 사전 속에 그로테스크라는 번지수에 생생히 살아있다.
평론가 김현은 그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그를 규정하는 두 단어 그로테스크와 리얼리즘.
나에게 리얼리즘은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들이 공유하는 공공재이다.
그러나 그로테스크는 오직 기형도 혼자서 탐욕스럽게 독점하고 있는 사유재이다.
내가 이례적으로 하나의 단어에 대한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
그의 탐욕이 너무 강하고,
그의 욕망이 너무 견고한 나머지
사유화를 인정 당한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은
기형도와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동치될 수 있다.
그 아픔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기형도를 아는 사람들은
기.형.도라는 이름만으로도
잊혔던 감정들이 뛰쳐나와
얼싸안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기형도를 아는 누군가와
기형도를 아는 나는
그로 인해 뛰쳐나온 감정들의 인사가 끝나기를
어정쩡하게 기다린다.
행복
그것은 꼭 유쾌한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의 고독은 쾌락을 보내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가?
나와 같이 소박한 '정상인'은
고독이 도사리는 칠흙같은 어둠을 보며
'저기에 뭐가 있을까?'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지만
기형도와 고흐는
우리를 대신해 그곳을 탐색하고 있다.
그들이 직면한 고독을 3,500원의 시집과,
5,000원의 싸구려 화첩을 통해 간접경험한다.
나는 그들 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는 '소시민적인 정상인'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가식적인 유쾌로 행복을 가장할 것인가?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들을
또박또박 느끼며 살 것인가?
지나가던 대학생입니다 ^^
시를 배우면서 기형도 시인에 대해서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요,
발표문을 마치면서 내년이 기형도 시인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라고 했었어요.. 근데 너무 바빠다보니 까먹고 있었는데 요기 와서
다시 기억났어요^.^ 발표 준비하면서 기형도 시인 연보도 읽고
시도 읽고 수필도 읽고 했었는데.. 왠지 기형도 시인의 수필을 읽으면서
너무 멋져서 저도 혼자 푸른 노트 사서 일기 같은걸 끄적여 보곤 했었어요.. ㅎㅎ
책에서 보던 이름이 여기 포스팅에 많이 있어서 왠지 반갑기도 하고.. 좋은 글 읽고갑니다~
저도 여기 한 번 찾아가보고 싶어지네요..
기회가 되면 기형도 시인의 묘소에 한번 다녀오시길^^^
연세문학회의 까마득한 후배입니다. 21세기 이후에 들어온 학번이니..
사진 속에 아는 후배들도 있고 유명한 선배분들도 계시군요. 성석제 선배님 같은 경우에는 소설쓰기 수업에서 뵌 적도 있고..
저 자리에는 선약 때문에 아쉽게도 가지 못했지만 참 아쉬운 자리였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기형도 선배를 추모하면서도 그 분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큰 거목이 되셨을지 아쉬울..
덕분에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좋은 선배를 두신 분이군요.
절차탁마 하셔서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기형도 시는 모두 유언 같았어요
더구나 빈집 같은 시는 더 그랬죠
그는 왜 부산의 보림극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나요?
이제 좀 잊혀지는가 했는데 님의 글을 읽고 기형도 시인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군요
기형도 시인이 최후를 맞은 곳은 부산 보림극장이 아니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극장입니다. 뭔가 오해를 하신듯^^^
저도 MBC문화가산책 케스팅되어서 광명 소하리에 기형도 생가가 있던자리와 안양천변을 거닐며 기형도시인의 발자취를 느꺼봤는데..
집필하던 생가는 없고 그터에는 가건물이 덩그러니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광명시민회관에서 추모행사가 있었지요..
그의 흔적이 무참히 사라져버렸다니 아쉽군요.
그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나면 문화사적인 가치가 잇을텐데 말입니다.
10여년전 고인의 시집을 들고 독일이란 낯선 땅에서 살기 시작했던 그 때가 생각나네요. 언제나 제 마음의 책꽂이에 존재하는 시들, 삶들, 장면들.
가슴에 묻어둔 고인의 글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희망, 기형도.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이유정님, 반갑습니다^^^
전 올해 스물로 막 대학에 입학한 국문학도입니다.
작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가끔 기형도 시인의 시가 나오면 언어 영역에 출제되는 수많은 주옥같은 시 중에서도
단연코 그의 재능이 탁월하고 비상하다는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고 방금도 막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그의 시집을 뒤늦게나마 인터넷 주문 했습니다.
요새 기형도 시인 요절 20주기다 뭐다 열풍이 불고들 있는데
저도 한번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고 싶어서 이를테면 무덤, 생가, 시비 등 고인의 흔적이 있는 곳을 답사할 요량입니다.
여쭙고 싶은 것은 그 분의 무덤, 생가, 시비 등 그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통해 무덤의 위치는 알게 되었고..
이 밖에 여러 장소 추천부탁드리겠습니다.
또 이왕이면 제가 인천 계양구에 살고있는데요(가장 가까운 역은 임학) 때문에 서울, 경기권내에서 안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똘레랑스님, 반갑습니다...
문의하신 사항에 대해 말씀드리면요,
우선 제가 아는 게 별로 없네요, 어쩌죠?
묘소는 이미 아셨을 테지만,
생가는 기보진 않앗는데요, 듣자하니 이미 헐렸답니다.
그리고 어디서 시비를 세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혹 문학과지성사에서 알고 잇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기형도와 친햇던 소설가 성석제씨에게 문의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알면 도와드리겟는데, 현재로선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우연히 만난 페이지에서 이름만 들어도 깊숙한
마음 끝을 훑어 내리는 아픔이 느껴지던 시인,
기형도님의 이야기를 읽었네요. 전 90년대초반에
대학을 다녔어요. 그분의 첫 시집, 문지사의
"입속의 검은 잎"을 읽고 난 후, 충격을 받았어요.
말로 표현할 수없는 동질의 감수성을 함께 알아
버렸지요. 이렇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우는 경험을 할 수있게 하는 건, 그분의
시상, 그분의 시가 주는 특권이겠지요...얼마나
감사한지요. 사진과 글, 정말 감사합니다.
글과 사진...퍼가도 될런지요...
신문에서 보고 넘 궁금했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반갑네요.
요즘...입속의 검은 잎을 읽고 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마치 사회과학도서를 읽는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기자이면서 사회과학도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치열하게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egoing.net/1036 글과 함께, 상기 내용의 URL 링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형도의 친구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계동 골목길을 내려오며 같이 부르던 노래 웬아이 워즈..
카튼 휠즈...
같이 먹던 떡뻑이...
같이 보던 비원의 단풍
형도가 썻던 하나 둘 셋의 시
누구에게나 친절한 마음씨
활짝 웃던 그 얼굴
저세상 가기 몇일전 친구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준 친구
아직도 친구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제 우리도 30주년을 지냅니다.